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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관계 이슈와 사건

4차 대만 해협 위기의 가능성과 국공내전과 대만 해협 위기의 역사

by Keep Learner 2022. 8. 4.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  이후

중국은 외교부 성명을 통해 경고한 강력한 위협을 실행에 옮기고 있습니다.

 

언론에서는 이번  군사적 위기 고조를 제4차 대만 해협 위기라고 하는데요. 

오늘은 과거의 대만 해협 위기 사례를 되짚어보고 

이번 사건으로 인한 군사적 위기 고조가 제4차 대만 해협 위기로 불리게 될 것인지

전망해보록 하겠습니다.

 

SUMMARY
1. 4차 대만 해협 위기의 가능성
  A. 8월 4일~7일 중국의 대만 주변 대규모 군사 훈련(그러나 무력시위 수준, 이는 미국도 예상)
  B. 위기로 치닫기 위해서는 중국의 군사력을 활용한 실제 타격과 미국의 군사적 대응이 이루어져야 함
2. 국공내전의 전개와 국민당의 타이완 정부 수립
  A. 1927년부터 1936년까지 제1차 국공내전, 1946년부터 1950년까지 제2차 국공내전
  B. 1949년 국민당이 대륙에서 철수하여 타이완 섬 이동
3. 1954년 제1차 대만 해협 위기
  A. 1954년 8월 국민당 정부 금문도(진먼섬)와 마주도에 15,000명의 병력 배치 및 방어 진지 구축
  B. 8월 11일 중국은 대만을 자유화(liberated)시키겠다고 선언, 해당 지역 군사력 배치 및 금문도와 마주도에 포격
  C. 12월 2일 미국과 대만 상호방위조약을 체결
  D. 1955년 1월 18일 중국은 대만이 점유하고 있던 강산도를 점령하고 금문도와 마주도를 공격
  E.1월 29일 대만에서의 미국 군사력 사용을 승인하는 포모사 결의(Fomosa Resolution) 의회 통과
  F. 미국의 해군의 대만 배치 및 핵사용 위협
4. 제1차 대만 해협 위기의 완화
  A. 1955년 4월 반둥에서 개최된 아프로-아시안 컨퍼런스에서 중국이 미국에 회담 제안
  B. 9월 제네바에서 회담 : 국민당 인물 송환 문제와 미래 분쟁 시 긴장 완화 방안 논의

 

1. 4차 대만 해협 위기의 가능성, 대만 해협 위기란 무엇인가?

 

그동안 대만 해협 위기는 중국과 대만의 군사적 충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였습니다.

중국의 대만 위협에 대한 미국의 대만 지원,

그리고 이에 따른 중국과 미국 양측의 군사적 갈등이 고조된 사건을 일컫습니다.

 

이번 낸시 펠로시 하원의원의 대만 방문에 따라

중국은 8월 4일부터 7일까지 대만 주변을 둘러싸고 실사격 훈련을 포한한 대규모 군사훈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중국이 군사훈련을 진행하는 지역 중에는 대만이 영해라고 주장하는 해상 영역까지 포함이 되어 있죠.

중국은 대만의 주요 항구와 해상 통행로를 둘러막는 6개 지역에서 훈련을 진행 중이며 

대만을 포위하는 군사작전에 대비한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탄도미사일 11발을 대만 북남동부 해역으로 발사하여 대만 국방부에서 이를

불합리한 행동이라며 규탄하였습니다.

 

현재까지 수준의 군사도발은 미국도 충분히 예상했을 것이며 

무력시위(Display of Force) 수준에서는 미국의 군사 개입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중국이 도발의 수위를 높여 무력의 사용(Use of Force)으로 대만의 도시지역에 대한

실제 타격이 이루어질 경우 미국 역시 군사적으로 대응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경우 중국의 군사적 대응과 미국의 군사적 대응이 서로 주고 받으면서 

긴장이 고조되게되고 새로운 대만 해협 위기로 정의될 수 있을 것입니다.

 

2.  국공내전의 전개와 국민당의 타이완 정부 수립

 

근대의 중국은 일본을 비롯한 여러 열강의 침략을 받았지만 

1900년대 초중반에는 무엇보다 국공내전(Chinese Civil War)으로 불리는

중국공산당과 중국국민당 사이의 내전으로 인하여 국내적으로 힘든 시간을 겪었습니다.

 

1927년부터 1936년까지 제1차 국공내전,

1946년부터 1950년까지 제2차 국공내전이 벌어졌죠.

 

1937년 제1차 국공내전이 중단된 이유는

일본의 본격적인 침략으로 인하여 국민당과 공산당이 힘을 합쳐 일본군과 전쟁을 해야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제2차 국공합작(1937년~1945년)이라고 합니다.

 

제1차 국공합작은 1924년부터 1927년까지 이루어졌는데요.

이는 중국공산당의 통일전선전술로 인하여 오래가지 못하고 곧 결렬되었죠.

(공산당의 통일전선전술은 세력이 약한 상황에서 상대와 동맹을 맺고 서서히

상대의 세력을 잠식하는 전술을 의미합니다.)

 

1946년부터 다시 시작된 국공내전에서 중국대륙을 지배하고 있던 국민당은 

공산당에 밀리기 시작합니다.

결국 1949년 대륙에서 마지막 거점인 청두에서 대만으로 탈출하게 됩니다.

이로써 공산당은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하고,

1949년 12월 국민당은 타이완에서 정부를 수립하게 되어

오늘날의 중국과 대만의 형태가 된 것이죠.

 

3. 1954년 제1차 대만 해협 위기

 

국공내전이 종료되고 1954년 8월 국민당 정부는

금문도(진먼섬)와 마주도에 15,000명의 병력을 배치하고

방어를 위한 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금문도에 위치를 한번 확인해보겠습니다.

현재도 인구 약 10만 규모의 도서지역인 금문도는 타이완 섬보다는

중국대륙과 가까운 대만의 최전선 지역입니다.

 

금문도/진먼현(Kinmen country) 위치(멍멍이 프로도가 바로 위에 있는 곳입니다) / 출처 : 구글맵

 

그렇기 때문에 중국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이며

대만 입장에서는 중국은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는 위태로운 지역이죠.

 

대만의 군사력 배치에 대응하여 중국의 저우언라이는 8월 11일

대만을 자유화(liberated)시키겠다고 선언하며 해당 지역에 군사력을 배치하고

금문도와 마주도에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은 공개적으로 중국의 대만에 대한 군사적 공격을 반대하였고

중국의 포격으로 금문도에서 활동하고 있던 미국인 고문 2명이 사망하명서

아시아에서의 공산주의 확산에 대한 미국의 위협인식은 더욱 높아졌습니다.

 

그리고 중국 공산주의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만을 수호해야 한다고 판단하게 되죠.

이에 따라 미국과 대만은 1954년 12월 2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중국은 미국과 대만의 조약체결을 비난하며

공격을 이어갑니다. 1955년 1월 18일에는 대만이 점유하고 있던

강산도(江山岛)를 점령하고 금문도와 마주도를 공격하였습니다.

 

이에 대응하여 미국에서는 1955년 1월 29일 중국의 대만 공격을 막기 위한

미국의 군사력 사용을 승인하는 포모사 결의(Fomosa Resolution)가 의회를 통과하게 됩니다.

 

포모사 결의에 따라 미국은 대만 주변에 해군을 보내 대만을 지원하였고

공개적으로 중국에 대한 핵무기 사용을 위협하였습니다.

 

다시 미국의 전술을 벼랑 끝 전술(Brinksmanship)이라고 표현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이는 최근 북한과 러시아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이죠)

 

4. 제1차 대만 해협 위기의 완화

 

미국의 군사적 개입으로 양국의 위기는 더욱 극으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1955년 4월 반둥에서 개최된 아프로-아시안 컨퍼런스(Afro-Asian Conference)에서

중국의 외교부 장관 저우언라이가 미국에 협상에 대한 의향을 내비쳤습니다.

 

이러한 중국의 변화 배경으로는 

미국의 벼랑끝 전술을 활용한 군사력 배치 및 핵무기 사용 위협도 있었지만

소련이 중국에 긴장의 완화를 요구했던 점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1955년 9월 중국과 미국은 제네바에서 회담을 갖고 

국민당 인물의 송환 문제와 미래 분쟁에서 긴장 완화 방안 등을 논의하였습니다.

 

제네바의 회담을 끝으로 제1차 대만 해협 위기는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958년 또 다른 위기가 이 지역에 찾아오죠.제2차와 제3차 대만 해협 위기는 다음 포스팅에서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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