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제관계 이슈와 사건

1958년 제2차 대만 해협 위기

by Keep Learner 2022. 8. 5.

오늘은 지난 포스팅에 이어서 계속해서 대만 해협 위기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지난 포스팅에서는 국공내정과 국공합작 그리고 1954-1955년 제1차 대만해협 위기에 대해 알아보았는데요.

오늘은 제2차 대만 해협 위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SUMMARY
1. 1956년 제2차 중동전쟁과 1958년 이라크 혁명
  A. 1932년 영국으로부터 독립 후 친서방 성향의 하심 왕조가 이라크 통치, 영국의 석유 이권 보호
  B. 1956년 7월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 영국 및 프랑스 소유의 회사가 운용하던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 선언
  C. 1956년 10월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제2차 중동전쟁 발발
  D. 제2차 중동전쟁 종류 후 이집트 중심의 범아랍주의 부상
  E. 1958년 이라트 군부의 나세르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쿠데타 발생, 이라크 왕조 전복, 반서방 정책
  F. 이라크에서의 이권 상실을 우려한 영국 및 미국의 적극적인 대응

2. 1958년 제2차 대만 해협 위기

  A. 중국의 중동 혁명 지지 및 지원 결정
  B. 1958년 8월 23일부터 중국의 금문도에 대한 대규모 포격 실시
  C. 대만의 긴급사태 선포 및 미국의 적극적인 군사지원
  D. 중국과 대만의 대규모 해상 충돌 이후 미국의 핵사용 위협
  E. 10월 5일 중국 국방장관 펑더화이가 포격 중단 발표

1. 1956년 제2차 중동전쟁과 1958년 이라크 혁명

 

1955년 제네바 회담을 통해 제1차 대만 해협 위기가 마무리되었지만 

금문도 주변에서의 중국과 대만의 국지적인 군사충돌을 계속해서 이어졌습니다.

 

1958 6월에는 마조열도(마조도)  주변에서 양측 해군 간의 충돌이 발생하여

중국의 함정 2정이 격침되었고,

7월 29에는 공중에서 충돌이 발생해 대만의 공군기 2기가 격추되었습니다.

 

그러던 와중 1958년 7월 14일 이라크에서 발생한 혁명으로 인해

제2차 대만 해협 위기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왜 이라크의 혁명이 대만 해협의 위기로 이어진 걸까요?

그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1958년 이전 이라크는 현재 요르단 왕실과 그 뿌리를 같이하고 있는 하심(Hashim) 왕가가 다스리고 있습니다.

하심 왕가는 1932년 이라크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파이잘 1세(Faisal) 국왕의 즉위로 이라크를 통치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이라크는 영국으로부터 독립은 했지만 여전히 영국으로부터 상당한 간섭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영국은 이라크 왕실을 지원하여 왕실이 이라크의 석유와 관련된 영국의 이권 유지를 돕도록 하였죠.

또한 다시 이라크에는 외국인 자문단이 영국을 비롯한 서방의 이익을 유지할 수 있도록 

이라크 내정에 강력하게 개입하였죠.

 

그러던 와중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은 영국과 프랑스 소유의 기업이 수에즈 운하를 운영하며

자국에 이권에 개입하는 것에 반대하여 아랍 민족주의를 강화하고 

1956년 7월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하게 됩니다.

 

이집트의 이러한 반서방 움직임에 대응하여 미국은 

친서방 국가인 이라크를 중심으로 터키, 이란, 영국, 파키스탄이 참여하는 군사동맹체제인

바그다드 조약 기구(이후 CENTO로 개칭, Cental Treaty Organization)를 설립합니다.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는 이스라엘과 군사협정을 맺고 이집트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1956년 10월 29일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시나이반도를 침공하게 됩니다(제2차 중동전쟁).

전쟁은 이스라엘이 승리하였지만 미국과 소련이 개입하여 수에즈 운하가 이집트의 소유로 확정되고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에서 철수하면서 이집트의 외교적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이를 계기로 중동의 아랍 국가들에서는 반서방 운동이 거세지도

1958년 이집트를 중심으로 시리아와 요르단이 힘을 합쳐 아랍연방공화국(UAR)을 출범시킵니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에 힘입어 이라크에서는 친서방 하심 왕조에 반대하는 군부의 쿠데타가 일어나게되죠.

 

바로 이 사건이 1958년 7월 14일 이라크 혁명입니다.

 

이라크 혁명으로 친서방 이라크 왕조가 전복되고

공화주의를 주창하는 군부가 정권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군부는 서방과 이스라엘에 반대하는 이집트 중심의 아랍연방공화국 편에 서게 됩니다.

 

이는 영국과 미국에 큰 위협이었습니다. 이라크를 점령한 군부는 영국과의 방위조약인 바그다드 협정을 탈퇴하고

서방과 거리를 두며 소련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자 했습니다.

 

이에 따라 미국은 7월 15일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레바논에 군사력 보내

중동에서 확산되고 있는 범아랍주의 물결을 저지하려고 했습니다.

 

2. 1958년 제2차 대만 해협 위기

 

이에 따라 중국은 중동의 혁명 세력을 지원한다는 명복하에

미국이 혼란한 틈을 타 1958년 7월 15일 중앙군사위원회에서 군사행동을 결정하고

7월 29일부터 제공권 확보 등 포격을 위한 여건조성을 시작하였습니다.

 

금문도 주변 중국의 군사적인 움직임에 대만은 7월 17일 특별경계태세에 돌입하고 

8월 6일 긴급사태를 선포하면서 대만 해협의 위기가 고조되었습니다.

대만의 긴급사태 선포로 미국 역시 해당 지역에 군사력을 투입하여 대만을 지원하였습니다.

 

이 시기부터 1958년 제2차 대만 해협 위기라고 부릅니다.

 

중국은 8월 23일부터 10월 5일까지 47만발의 포격을 금문도에 퍼붓습니다.

중국의 포격으로 대만은 진먼사령부 부사령관을 포함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대만 역시 반격을 하며 중국을 공격하였습니다. 미국은 제7함대를 대만해협에 배치하였습니다.

 

당시 미국이 대만 지역에 투입한 전투력은 항공모함 6척, 전함 130척, 전투기 500대 뿐만 아니라

해병대와 육군을 합쳐 약 9,000여명의 병력이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미국은 대만과 연합 훈련을 실시하며 중국에 대한 무력시위를 이어갔습니다.

 

이 과정에서 9월 2일에는 중국과 대만의 해군이 크게 충돌하여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해상에서의 대규모 충돌로 인하여 미국을 위협의 수위를 높이고

핵무기를 사용하여 중국을 공격하는 방안을 검토하였습니다.

 

이에 소련은 중국과 미국을 모두 말리며 핵무기 사용으로의 확전을 막기위해 노력했죠.

 

10월 5일 중국 국방부장 펑더화이가 금문도에 대한 7일간의 일시적인 포격 중단을 발표하였으며

이후 간헐적으로 포격을 해오다 점진적으로 줄어들어 1979년에 미중 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완전하게 포격이 중단되었습니다.

 

제2차 대만 해협 위기는 제1차 위기가 완화되고 얼마지나지 않은 시점에 발생하였습니다.

그리고 1958년 이후 1979년 미중 수교 전까지 양국은 큰 충돌없이 냉전의 긴장 상태를 이어갑니다.

 

마지작 제3차 대만 해협 위기는 다음 포스팅에서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