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는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으로 인해 촉발된
대만 해협에서의 군사적 긴장과 관련된 포스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지난 제1차, 2차 대만 해협 위기에 이어서 제3차 대만 해협 위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SUMMARY
1. 대만 독립을 원했던 대만의 리덩후이 총통
A. 농경제학자 출신의 대만 독립을 추구하는 리덩후이 총통
B. 1988년 총통 대행을 시작으로 1990년 초선, 1996년 재선으로 장기간 총통 직책 수행
C. 활발한 외교활동과 중국에 대한 강경한 대응
2. 리덩후이의 코넬대학교 연설과 중국의 반발
A. 1995년 모교인 코넬대학교 연설 일정 계획
B. 중국이 미국 국무부에 리덩후이에 대한 비자 발급 금지 요구
C. 미국 의회의 결의안으로 리덩후이 비자 발급 후 미국 방문
D. 중국의 강력한 무력시위 시작
3. 1996년 제9대 대만 총통 선거의 도래와 위기의 고조
A. 리덩후이의 총통 재선을 막기위해 중국은 무력시위의 수위를 한층 높임
B. 미국은 제7함대의 2개 항모전단을 대만 인근 해상에 집결 시켜 중국을 압박
C. 총통 선거에서 리덩후이가 재선되면서 중국의 목표 달성 실패
D. 이후 서서히 군사력 철수 및 긴장 완화
1. 대만 독립을 원했던 대만의 리덩후이 총통
1995-1996년의 제3차 대만 해협 위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당시 대만의 총통이었던 리덩후이 총통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그는 농업경제학을 전공한 학자 출신으로
국립타이완대학교 농업경제학에서 학사를 마치고
미국의 코넬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박사학위를 마치고 귀국 후에는 모교인 국립타이완대학교의 농경제학과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런던 중 1971년에 국민당에 입당하여 타이베이 시장, 타이완성 주석 등을 거쳐서
1984년 부총통에 임명되었습니다.
당시까지 대만은 초대 총통인 장제스를 이어 그의 아들인 장징궈가 총통에 되면서
국가원수의 자리가 세습되었습니다.
하지만 1988년 장징궈가 사망하면서 당시 부통총이었던 리덩후이가 총통 대행을 맡았고,
2년 뒤 1990년 제8대 총통 선거에서 85.24%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되면서
승계가 아닌 선거로 당선된 최초의 대만 총통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까지 대만의 정치는 중국 본토 출신이 지배적인 역할을 해왔는데요.
리덩후이는 대만 현지 출신으로 당시 정치계의 비주류로서 총통이 되어서
정계의 큰 변화를 이끌었습니다.
그는 대만 민주화의 아버지라고 불릴만큼 대만 정치에서
민주적인 제도 정착을 위해 힘썼는데요.
그 중 하나가 총통 직선제 도입이었습니다(1996년 9대 총통 선거부터 직선제가 시작되었죠).
대외적으로는 대만의 고립을 막기 위해 활발한 외교 활동을 펼쳤고
적극적으로 대만의 독립을 주장하며 중국의 짱쩌민 주석과 날을 세웠습니다.
2. 리덩후이의 코넬대학교 연설과 중국의 반발
이러한 외교활동의 일환으로 리덩후이는 모교인 코넬대학교에
초대를 받아 '대만의 민주화 경험'이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에 있는 코넬대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미국 비자가 필요했고
1979년 중국과 수교를 맺으면서 미국이 대만과 단교하였기 때문에
당시 중국에서는 수교를 맺지 않는 국가의 원수에 비자를 발급은 옳지 않다며
미국 국무부를 압박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미국 상원과 하원이 나서서 리덩후이의 미국 방문을 허용하라는 결의안을
압도적인 지지율로 통과시켰고 이로인해 리덩후이는 계획대로 코넬대학교에서 연설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의 중국' 정책을 강조하는 중국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미국의 대만에 대한 조치가 국제사회에서 대만의 주권 인정이라는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판단하여 강경한 조치를 취하기로 결정합니다.
이에 따라 중국은 1995년 7월 21-26일 대만 해협에서 미사일을 발사하고 대만 건너편의
푸젠성에 군사력을 배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8월에 개최된 중국과 미국의 외교장관 회담에서
중국은 미국에 하나의 중국 원칙을 존중해줄 것을 요구하였고
미국이 이를 거부하면서 중국과 미국의 간의 긴장 상태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이에따라 중국은 미사일 발사를 재개하였고 8월 중순부터 공공연하게 대만 상륙을 목표로 하는
대규모 상륙훈련을 진행하며 무력시위를 이어나갔습니다.
미국 역시 이에 대응하여 니미츠 항공모함으로 대만 해협을 통과하는 등 무력시위로 맞대응하였습니다.
3. 1996년 제9대 대만 총통 선거의 도래와 대만 해협 위기의 고조
이 시기 중국은 걱정거리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바로 1996년 3월 23일에 시행되는 제9대 대만 총통 선거였습니다.
그리고 제9대 총통 선거부터는 선거가 직선제로 변경되어
당시 대만 국민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던 반중 성향의 리덩후이가 재선될 가능성이 높았죠.
리덩후이가 재선이 될 경우 향후 양안관계가 중국이 원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에 중국은 어떻게든 리덩후이가 재선되는 것을 막고자 했습니다.
이에따라 1995년 7월부터 시작된 대만 해협에서의 위기를 이어나가
강력한 군사적 위협을 통해 중국은
"리덩후이 때문에 대만의 안보가 위태로우며 전쟁의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대만 국민들에게 전달하려고 했습니다.
이를 위해 중국은 1996년 2월부터 푸젠성 주변에 군사력을 더욱 강력하게 배치하고
대규모 군사훈련과 미사일 발사를 이어나가고 대만의 해상을 봉쇄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중국의 행동에
미국 역시 제7함대 예하의 5항모전대와 7항모전대를 대만 인근 해상으로 집결시켜
중국을 압박하였습니다. 그리고 미국은 대만을 방어할 것이라며 중국에 강력하게 경고하였죠.
3월 23일 총통 선거 결과 리덩후이가 54%의 득표율로 재선이 되면서
중국의 노력을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점진적으로 군사력을 철수시키면서 제3차 대만 해협 위기는
자연스럽게 해소가 되었습니다.
제3차 대만 해협 위기는 1979년 미중 수교 이후 미중 간 최대의 군사적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1954년 제1차 위기와 1958년 제2차 위기와 마찬가지로
미국이 강력한 군사력으로 무력시위를 하면서 중국을 압박하였고
이를 통해 대만의 위협을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펠로시 방문으로 인해 발생한 중국의 군사적 도발은
대만을 포위하는 등 높은 수위로 진행되었지만
미국이 군사적으로 대응하지 않으면서 위기는 서서히 완화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위기에서 과거와 같이 미국이 항공모함전대를 대만 해협에 배치하는
방식으로 대응한다면 중국이 더는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미국도 이를 알고 있기 때문에 위기를 고조시키지 않으려 하는 것이죠.
대만 해협 위기와 관련된 포스팅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에도 쉽고 재미있는 국제정치&정치학 포스팅으로 만나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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