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포스팅에서 절대왕정과 유럽의 혁명을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특히 프랑스 혁명은 왕정을 전복하고 공화정이 수립됨에 따라
세계사에 커다란 획을 긋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후의 세계는 이전과는 매우 다른 양상으로 흘러가게 되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은 이전과 다른 전쟁이었고
이후의 세계는 근대의 여명이 되었죠.
1. 나폴레옹 전쟁
1795년부터 1815년까지 진행된 나폴레옹 전쟁은 과거와는 매우 다른 형태의 전재이었습니다.
왕국의 군대는 왕을 지키기 위한 군대이지 국가의 국민들을 지키기 위한 군대는 아니였습니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으로 프랑스는 왕국이 아닌 공화국이 되었고,
이러한 공화국의 군대는 왕국의 군대와 달리 국민을 지키기 위한 국민의 군대였으며
국민들로 구성된 국민 군대였습니다.
프랑스 군대는 나폴레옹의 군사적 천재성과 국민군대를 바탕으로 한 군사혁신으로 통해
다른 유럽국가들을 압도하는 전투력을 발휘했습니다.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군대는 정말 강력했고
이들은 단순히 영토를 정복하는 것을 넘어서
"공화주의"라는 급진적인 정치사상을 퍼뜨리는 군대였기에
유럽의 군주국가들에게는 정말로 큰 위협이었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 전쟁은 프랑스와 다른 유럽 군주국가들의 연합의 싸움이었습니다.
그리고 일대 다수의 불리한 전쟁에서 프랑스는 매우 큰 성과를 보여주었죠.
하지만 프랑스 군대는 러시아 원정의 실패를 기점으로 크게 축소되었으며
워털루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하면서 전쟁에서 패배하게 되었습니다.
2. 나폴레옹 전쟁 전후 처리를 위한 빈 회의와 유럽협조체제
나폴레옹 전쟁은 유럽 연합군의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이들 연합군의 목표는 공화주의 사상을 유럽에서 몰아내고 군주제를 강력하게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 전쟁의 전후 처리 중심은 프랑스에 전쟁의 책임을 묻기 보다는
프랑스를 원래의 왕정으로 복구하고 이러한 공화주의가 유럽의 군주국들을 다시 위협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1814년부터 1815년까지 오스트리아 빈에서 회의가 개최되었고
빈 회의의 의장인 오스트리아의 외무장관 메테르니히(Metternich)가 회의를 이끌었습니다.
그는 전통주의와 보수주의를 제창하며 세력균형을 통해 구체제를 유지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연합군의 주요 군주국이었던 영국,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가 4국 동맹을 맺고
나폴레옹의 부활 및 혁명의 재발을 방지하고 구체제에 대한 도전을 억제하기 위한
국가 간 협조를 약속하였습니다.
이러한 4국 동맹은 1818년 패전국이었으나 왕국으로 다시 부활한 프랑스를 포함하면서
5국 동맹으로 확장되었으며 이러한 유럽의 5개 강대국이 함께 동맹을 맺어 구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체제를 유럽협조(Concert of Europe) 체제라고 불렀습니다.
이들 주요 강대국은 군주국으로서 서로 협력하고 유럽 내 보편적으로 왕정이 유지될 수 있도록
노력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큰 공헌을 한 사람이 바로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었습니다.
물론 빈 회의 당시 영국의 왕은 빅토리아 여왕은 아니였지만
이후 유럽의 왕가들이 쉽게 협력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이들 모두 빅토리아 여왕을
중심으로 연결되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빅토리아 여향을 유럽의 할머니라고도 부르는데요.
다음은 빅토리아 여왕에 대한 이야기와 혈연이 만들어낸 유럽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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